5월 212003
 
그냥 FF10탄 동영상을 보고 나서 드는 생각에 끄적여본 글입니다. 아직 FF10을 제대로 해본 건 아닙니다만 적어도 남녀주인공 생긴 게 더럽게 마음에 안 든다는 점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의 동영상을 선보여버렸으니 앞으로는 또 얼마나 되는 물건을 내놓아야 유저들의 눈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 그리고 그만큼 게임의 퀄리티가 따라갈 수 있을지, 겉보기에만 화려한 속빈 강정들이 다시금 속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써본 ‘편견과 독단’으로 가득찬 글입니다.

언젠가부터 게임이 변하기 시작했다.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잘 팔리는 게임 = 잘 만들어진 게임’이라는 등식이 성립했었다. 영세적인 소규모의 제작사라도 참신한 아이디어를 통해 일정 수준의 판매량 정도는 기록할 수 있었고 그랬기에 많은 중소 제작사들이 좋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 매진해왔다.
그러던 어느날 CD-ROM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게임기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롬팩이나 플로피 디스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용량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동영상과 CD라는 매체의 특성을 이용한 고음질의 음성 혹은 음악을 그대로 삽입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혁신적인 요소였으며 그러한 요소 자체가 당시로서는 게임성의 일부분을 차지하게 된 새로운 개념이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Super Famicom(SFC), Mega Drive(MD), PC엔진의 시대를 지나 새턴과 플레이스테이션 등 차세대 게임기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그러했던 양상이 지나치게 부각됨에 따라 게임 자체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즉 게임성 자체보다는 비주얼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3D CG 혹은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화려한 동영상을 중시한 나머지 제작사들이 정작 완성도 높은 게임을 만들기보다는 보다 겉보기에 화려한 게임을 만드는데 치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이자 시발점은 Square사의 Final Fantasy(이하 FF) 7을 들 수 있다. 이 FF7은 수퍼패미컴으로 6탄까지 시리즈가 인기리에 이어져온 후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넘어오면서 경쟁기종이었던 새턴에게 플레이스테이션이 결정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줬을 정도로 높은 지명도를 지녔고 그만한 완성도도 겸비하고 있었던 시리즈이다. 그리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FF7은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아마노 요시타카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자사의 스탭이었던 노무라 테츠야를 중용한 점, 그래픽을 2D에서 3D풍으로 바꾼 점, 그리고 게임의 분위기 자체를 근본적으로 일신한 점 등등. 어떻게 보면 기존의 FF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들은 특히 기존에는 게임과는 거리가 먼 계층이었던 소위 동인녀들에게 크게 어필하는데 성공해서 새로운 FF시리즈를 이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자승자박의 결과를 낳게 됐다. SFC시절까지만 해도 만드는 게임마다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보여주면서 고정적인 팬층을 확보하던 스퀘어사가 이후로 내놓은 게임들은 어딘가 매너리즘을 보이면서 게임성 자체는 특별할 것도 없는 범속한 게임들을 양산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게중에는 할만한 게임도 제법 있긴 했지만 그동안 실력파 제작사로서 정평이 나있던 스퀘어의 지명도를 생각하면 납득하기 힘든 작품들이 더 많은 편이다. 그러나 CG무비만은 다들 상당한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FF 팬들에게는 죄송한 얘기지만 까놓고 얘기하자면 FF7은 재미없었다. 더 새로울 것도 없는 전투시스템은 로딩만 길어져서 짜증만 나게 하고 3시간만에 패드를 집어던지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처음에 볼 때에는 대단히 아름다워 보였던 3D CG의 영상미도 결국 비주얼신은 CG전용 플랫폼에서 제작된 것을 무비로 캡춰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고정돼있는 배경 CG는 눈속임에 불과했기에 나중에 볼 때에는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술력 자체로 놓고 따지자면 같은 해에 발매됐던 Game Arts사의 그란디아가 훨씬 뛰어났다. 마을이나 던전 하나의 맵을 통째로 모델링해서 세워놓고 360도로 빙글빙글 돌리면 2D풍의 텍스처를 입힌 아름다운 배경이 펼쳐진다. 단순히 고정된 배경을 보여주고 3D인척 눈속임을 하는 FF7,8이나 Capcom의 Biohazard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정성과 기술력이다. 그러나 그 해(1997년) CESA 게임 대상 최우수상은 ‘많이 팔리고 잘 알려진’ FF7이 차지했고 ‘잘 만들어진’ 그란디아는 우수상에 그쳤다.

그리고 FF 8편이 등장한다. 여전히 캐릭터 디자인은 노무라 테츠야, 이번에는 SD풍이 아닌 등신대 사이즈의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사실 FF정도 되는 대작의 게임의 메인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에는 실력상으로 역부족인 노무라 테츠야의 허접한 원화를 그만큼 표현해낸 스퀘어의 3D CG 팀은 칭찬을 해주지 않을 수 없지만 게임은 여전히 지겹기 짝이 없다. 보이는 거라고는 CD 용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하이퀄리티의 무비들뿐이지만 겨우 저 무비를 보기 위해 이런 개삽질을 해야 한다는 건가? 절대 그런 짓은 할 수 없었고 이 게임 또한 중간에 때려치고 말았다.

그러나 여전히 FF시리즈의 지명도는 높고 새 작품이 발매되면 첫 주에 2~300만 개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한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게임이 발매되자마자 용산에 게임의 동영상만을 수록한 비디오시디가 판매된다. 대체 게임을 위한 동영상인가 동영상을 위한 게임인가. FF시리즈는 일본의 RPG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작품이 아니던가? 이런 식으로 나오려면 일찌감치 완결을 지을 것이지 뭐 하러 구차하게 시리즈를 이어나간다는 말인가? 결국은 위에서 말한 대로 자승자박이다. 그런 하이 퀄리티의 무비를 제작하기 위해 게임 하나에 들어가는 제작비는 나날이 커지고 게임은 그만큼 팔려주지 않는다. 그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는 일단 나오면 팔리는 화이날 환타지라는 이름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양대 산맥이었던 드래곤퀘스트(이하 DQ)시리즈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실상 DQ시리즈는 3,4탄의 디렉터였던 나이토 칸이 빠져나간 이후 5탄이 나오면서 그 생명력을 잃었다. 어떻게 보면 변모한 FF와는 달리 DQ다움을 잃지 않고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진부한 구성과 스토리는 솔직히 이 게임이 DQ의 이름을 달지 않고 나왔다면 50만개나 팔렸을까 하는 의문이 느껴지게 해준다. 그러나 어쨌든 DQ의 이름을 달고 나온 게임은 기본적으로 300만개 전후는 팔려주고 제작사는 이 매력적인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놓치기는 싫은 것이다.

스퀘어나 에닉스 같은 회사들도 이런 악순환에 빠질 지경인데 다른 중소규모 제작사는 오죽하겠는가. 잘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다. 적절히 만들어서 눈요기 거리만 채워주면 일정 수준 이상은 팔린다. 대다수의 제작사는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다. 여성향의 보이즈 러브 계열 게임이나 남성향의 미소녀 게임이나 별반 다를 바는 없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도가 있고 잘 된 일부 게임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사실 나는 미소녀게임도 즐기는 편이다.) 게임 업계 전반의 흐름이 결국 보이기 위한 게임을 만드는데 치중하기 시작했고 이는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큰 실망을 안겨주게 된다. 쿠소하기 짝이 없는 남코의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 같은 작품은 이노마타 무츠미가 작화를 담당한 오프닝의 힘으로 100만개가 넘게 판매되고 로봇대전 시리즈는 사실상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으로서는 지겹기 짝이 없는 구성으로도 그 고전 메카물 팬들의 힘을 등에 업어 나오면 항상 대작 취급을 받는다.

결국 꿋꿋하게 자신들의 게임 스타일을 고집하던 메이커들은 상당수가 휘청거리게 된다. 화의신청까지 갔던 Compile이 그랬고 자사의 하드를 포기하고 간판 타이틀을 경쟁기종에 이식하기로 결정했던 세가가 그랬다. 반면에 그런 조류에 잘 영합한 코나미 같은 경우는 지금 가장 높은 매출액을 기록하는 제작사 중 하나이다. 시대의 흐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즐기기 위한 것’, ‘재미있어야 한다’ 라는 게임의 근본 이념이 뒤집혀야 할 것인가? 물론 그 즐긴다는 점이나 재미라는 측면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람 나름대로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저 그런 보이기 위한 측면에서 오는 재미는 순간에 지나지 않고 플레이어를 금방 식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의 끊임없는 욕구에 따라 그보다 더 화려한 것을 만들어야만 유저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반면에 순수하게 게임으로서의 재미를 추구한 작품은 쉽게 죽지 않고 유저를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그리고 먼 훗날에도 그런 작품들은 알아주는 사람은 적더라도 명작으로서 칭송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라면 어떤 게임을 만들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후자 쪽을 택할 것이다.

Starless: 그래도 FF10 퀄리티는 의외로 괜찮다고들 하더군요. 7~9보다는 훨씬 낫다던가, 해봐야겠습니다.  [12/19]
Lejark: 그래도 8은 시스템 뜯어보면 대단히 괜찮아. 7은 확실히 썩이지만.  [01/05-05:07]
Synodia: 잘 모르는, 그냥 플레이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스퀘어의 실수는, 사람들이 동영상에 감탄한다고 해서 동영상만 불린 데 있다는 것도 한 몫 했다고 보입니다. 마치 순정만화에서 꽃미남 꽃미남 하니깐 저질러버린 실수처럼요. 누군가 말했듯, 객관적으로 보아 농담으로라도 ‘꽃미남’이라 할 수 없는 그림의 레디온이 미남으로 보였던 것은 ‘스토리’의 힘이었듯, ‘동영상’에 대해 감동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나올 때  [09/08-12:01]
Synodia: 그것이 나올 때까지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던 ‘스토리’때문인데, ‘스토리’는 대강 맞추고 ‘동영상의 화려함’에 치중해봤자 ‘스토리’에 흥미가 없어진 사람들은 ‘동영상 수집’의 차원에서 시디를 사게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파판 6 엔딩에서 울어버렸던 것은, 1999년 보았던 그래픽이 환상적이어서가 아니었죠(..;). 그걸 다들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09/08-12:02]
Synodia: TRPG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플레이어들이 감동하는 순간은 ‘세련된 스토리’내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대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기가 주인공의 심정, 또는 주변 인물 중 하나의 심정과 같은 마음이 되면, 자신은 그 순간 게임 안에 들어가 싸우고 울고 웃는 것이죠. TRPG와 CRPG의 공통점이 아닐까 합니다. 놀랍게도 파티원들이 울었던 순간은 아주 상투적이고 고전적인 순간이었으니까요(쿨럭.;) 사람의 마음이란 의외로 고전? [09/08-12:06]
Synodia: 사람의 마음이란 의외로 고전적인 것 같습니다. (…그예 딴소리로 새는군요.; 핫핫핫)  [09/08-12:06]

  3 Responses to “게임을 위한 동영상인가, 동영상을 위한 게임인가”

  1. 비단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데.

    일본 RPG들이 총체적으로 지니는 매너리즘. 그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함.

    그럼 일본 RPG들의 매너리즘이란게 과연 무엇이냐.

    짧은 글솜씨로 한마디 하자면, 자유도 없는 “Digital Novel” 이 일본식 게임들의 성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잘 짜여진 탄탄한 스토리, 그리고 그 배경과 스토리에

    어울리는 게임 플레이와 캐릭터 아트 등, 일견 손색은 없다. 하지만, 그 속엔 플레이어는 없다. Cloud가 있고, 아도르가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이는 게임 속 “주인공”의 이야기가 될 수는 있지만, 자기만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저 사실을 간파하고, 제3자로서 구경하는 입장을 취하게 될 때, 자유도가 허락되지 않는 “RPG”란 물건은, 사실 가야 할 길과 풀어야 할 문제가 계속적으로 제공되는, 게임기 위에서 조악한 그래픽으로 옮겨놓은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여기에, 최근 들어 동영상으로 제작의 포커스가 편중되는 현상은 이 “디지털 스토리”로의 전락을 가속화하고, 두고두고 씹어볼만한 게임 플레이의 소재 자체를 말살하는, 사실 게임 자체를 쭉정이로 만들어버리는 참담한 결과를 빚고 있다. 아무리 FF 시리즈가 새로운 캐릭터 아트와 뭔가 다른 새로운 것을 들고 나와도 참패에 참패를 거듭할 수 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이미 그들은 게임을 만들면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가늠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게임에 있어 생명과도 같은 “재미” 를 살리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 지를 이들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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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도 종종 심심하면 프론트미션이나, 드퀘류를 조물딱거리긴 한다. 하지만 그건 이들 게임 속에서 뭔가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기보다는, 예전의 기억을 되씹으며 그때의 감동을 다시 음미하기 위한다는 측면이 훨씬 강하다. 정말 재미있는 RPG라는 것을 내가 죽기 전에 다시 구경해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알게 모르게 암울한 생각마저 든다.

  2. 실제로, 요즘 들어 일본식 RPG의 물이 미국 시장에서도 꽤나 빠져나갔다. 이들 미국인 플레이어의 플레이 소감을 이야기하자면 바로 위의 이야기로 압축이 된다. 스토리를 보고 싶으면 영화를 보러 가든 소설책을 읽든 하지, 게임기에 붙잡혀 앉아서 의미없는 퍼즐과 레벨업 노가다에 수십시간씩을 퍼부으며 결국 제한된 스토리만을 봐야 한다는건 플레이어로서도 스트레스라는 것.

  3. cuchulainn // 아 이거 대략 4년 전에 쓴 글이라 지금이라면 또 다르게 할 얘기가 많을 겁니다. 아무튼 일본식 RPG도 미국식하고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전했고 그 방식도 나름대로의 장점이나 가치는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보는데 문제는 일본애들이 이후의 발전방향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거겠죠. 오히려 양키RPG에서 저런 시나리오라인의 도입을 역으로 해서 자기네들 나름대로 발전시킨 형태가 디아블로 같은 케이스 아닐까 생각합니다.그럼 그게 다시 일본에서 피드백이 돼줘야하는데 그게 안 되고있으니 지금 저렇게 버벅대는 걸지도요. 얘기하자면 더 길어지니 여기서는 이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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