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012002
 
지난 금요일에 메가박스에 가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스튜디오 지브리를 통해 간만에 내놓은 작품 센과 치히로의 카미카크시를 봤습니다. (그냥 행방불명이라고 안 적어두는 이유는 뒤에 언급하겠습니다.)

사실 보기 전에는 전혀 기대를 안 했습니다. 모노노케히메의 분위기나 결말부분에서 조금은 실망을 느꼈던 저는 미야자키 애니도 타성에 젖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버렸고 그래서 별 기대 없이 그저 아는 형과 함께 극장에 들어서서 작품을 보게 됐습니다.

감상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매우 좋았다는 겁니다. 기대를 안 했기에 뜻밖에 큰 만족감을 얻었고 큰 기대를 걸었다 해도 충분히 그에 부응하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겁니다. 어쨌든 미야자키 애니의 저력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줬습니다. 미야자키의 장인정신이나 연출력 등에 대해서는 이미 지겹도록 거론되어온 논제들이니 전부 차치하고 그저 제가 보면서 느낀 것을 크게 들자면 다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 떨어져버린 주인공이 그 역경을 헤쳐나가기 위한 ‘모험’을 겪는다는 컨셉트였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같은 경우는 애초부터 소년과 소녀의 모험이야기였으며 마녀의 우편배달 같은 경우 또한 낯선 마을에서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소녀의 모험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던 요소를 이 작품 또한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이세계에 떨어져버린 주인공. 부모님은 그곳에서 신벌을 받아 본래의 모습과 기억조차 잃어버리게 되고 모든 것이 까마득해보입니다. 그리고 뛰어난 연출을 통해 그러한 절박한 심정을 관객들에게 공감시킵니다. 그리하여 관객은 치히로와 함께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슬퍼하면서 동고동락하는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이입을 통해 치히로가 이세계에서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을 더욱 생동감있게 전달하고있으며 관객이 시종일관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둘째로 그 풍부한 상상력을 들고자 합니다. 토토로와 모노노케히메에서 잠깐 보여줬던 일본 전래의 신도사상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서양의 이질적인 환타지와는 다른 특이한 – 그들의 입장에서는 친숙하겠지만 – 세계관이 펼쳐집니다. 특히 그 세계에서의 일상을 지겨울 정도로 세세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앞서 서술한 치히로의 감정을 관객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함으로써 그러한 이질적인 세계에 관객들이 거부감 없이 몰입하게 만듭니다. 이는 미야자키가 고집하는 특유의 장인정신에서 기인한 부분도 적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동양적인 환타지물로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겁니다.

셋째로 느낀 것은 이 작품이 기존의 미야자키 스타일을 답습하면서도 곳곳에서 포스트 미야자키 시대를 대비해 앞으로도 스튜디오 지브리가 버텨나가기 위한 초석을 닦고자 하는 느낌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음이 곳곳에 보입니다. 우선 들 수 있는 게 미야자키 애니 최초(!)의 미소년인 하쿠의 존재입니다. 오바타 타케시 그림/홋타 유미 원작의 소년점프 연재만화 히카루의 바둑에 등장하는 토야 아키라를 연상시키는 분위기의 미소년 하쿠는 실제로 여성 관객들에게도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작품들에서는 마지막의 갈등이 어떤 초자연적인 힘 – 토토로나 나우시카, 라퓨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을 통해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모노노케 히메의 경우는 마지막에 파괴된 삼림이 결국 신의 힘에 의해 순식간에 해결되는 장면이 나와서 개인적으로 인간의 힘에 의해 그걸 되살려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었고 그 부분은 제가 모노노케히메를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난관을 대부분 주인공 스스로의 힘에 의해 해결합니다. 물론 초반에는 하쿠나 카오나시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만 그때는 너무나 막막한 상황에서 받은 도움이었으며 하쿠의 경우는 과거의 인연이 있었기에 나름대로 설득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후반, 특히 부모님찾기의 경우는 문제의 꿈과 연관되면서 결국 자력으로 모든 걸 풀어냅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 초자연적인 난관을 극복해나간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또한 곳곳에서 상당한 분량의 CG를 활용하고있습니다. 철저한 수작업에 의한 셀화만을 고집하던 미야자키 애니에서 – 모노노케히메에서도 CG가 사용된 바 있긴 합니다만 – 보다 배경이나 연출의 곳곳에서 CG가 보입니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그 CG가 셀화에 비해 너무나 이질감이 들어서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었습니다만 이렇게 노하우를 쌓아나가면서 앞으로 보다 효율적인 CG를 사용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품에는 많은 상징물이 나옵니다. 우선 제목에 쓰인 카미카크시(神隱し)라는 단어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카미카크시는 갑작스런 실종, 행방불명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물론 직역하면 이런 의미가 되긴 합니다만 이 단어의 뜻을 풀어보면 ‘신이 숨겼다’라는 뜻입니다. 즉 일본의 민간신앙에서 그러한 실종은 사람이 신에게 홀리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현실에서 사라져버린다는 의미를 품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 있어서의 카미카크시는 단어 그대로 ‘카미카크시’ 그 자체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 제목의 번역은 ‘행방불명’이 아닌 ‘카미카크시’라는 단어 자체를 그대로 썼어야 옳다고 봅니다. 물론 우리나라 정서에서 그것도 ‘아이들이 보는’ 만화영화따위에 일어단어를 그대로 쓰는 건 용납할 수 없었겠지만 어쨌든 아쉬운 노릇입니다.

그 외에도 아쉬운 부분이 몇가지 있긴 합니다. 그러한 상징물 중 머리띠가 의미하는 바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습니다. 제가 둔해서 알아채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왜 나온 건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쿠의 뒷얘기정도는 노골적으로 보여주진 않더라도 에필로그에서 간단히 상상의 여지에 약간의 구체성을 더해주는 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듭니다. 또한 이는 원작의 퀄리티 문제가 아닌 국내 수입단계에서의 무성의함이 되겠지만 중간에 소리가 1초정도 끊기는 – TV방송 같으면 충분히 방송사고로 취급됐을 – 부분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제가 본 곳은 메가박스 2관에서의 자막판이었습니다. 게다가 화면에도 잡티가 좀 많은 느낌이었고 화질이 썩 좋다는 느낌을 못받았습니다. 자막은 거의 보지를 않아서 단언하긴 힘들지만 번역도 지나치게 대충 넘어가는 부분이 종종 보였습니다. 최악까진 아니더라도 별로 좋은 번역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래저래 장황하게 써놨지만 단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작품’이며 ‘극장에 가서 돈 내고 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적절한 골계미와 적절한 심각함이 조화된 그 느낌이 좋습니다. 저는 여건만 되면 조만간에 한 번 다시 보고싶기도 합니다.

끝으로 여담이지만 이 작품에 나오는 제니(錢)바바와 유(湯)바바. 이름을 합치면 錢湯(せんとう : 유료 공중 목욕탕)이라는 뜻이 됩니다. 토토로에 나오는 메이(May)와 사츠키(五月)와 같은 맥락의 말장난이더군요.

P.S. 어제 한 번 더 보고 왔습니다. 메가박스 조조 4000원에서 삼성카드 할인 500 + 카이카드 할인 2000원, 즉 500원에 보고왔습니다. 이거 종종 애용해야 할듯. 어쨌든 이 글에서 깜박 간과하고 넘어갔던 부분은 히사이시 죠의 음악. 별로 취향이라거나 좋아하는 스타일의 음악은 아닙니다만 작품의 분위기나 각 상황에 매우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음악이 나오면서 내용을 고조시키는데 일익을 맡습니다. 또한 머리띠의 경우는 마지막에 강조되면서 치히로가 겪었던 일들이 허구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거였습니다.

1. 룬 :…..이걸 기회로 스튜디오 지브리도 미소년과 미소녀를 많이 키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문득 해봤음 (…) [07/01]
2. 룬 :음. 이제 다시 볼 기회가 안될거 같아서 많이 아쉽지 난. –;;; [07/01]
3. 木魂牙 :예전에는 미소녀 위주였는데 이제는 미소년 위주로 바뀌어가는걸지도.. — [07/14]
4. 동굴곰 :그 머리끈, 마법이 깃들어 있어서 부모를 알아보는데 도움을 주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는 듯? [08/01]
5. 동굴곰 :제니바의 ‘결국은 손으로 만들어야’ 운운하는 대사에 의미를 두기도 한다는 듯;;;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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