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032003
 
자객(刺客)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과 오늘날의 무협(武俠)이라는 장르의 기원을 이야기할 경우 보통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자객열전(刺客列傳)을 예로 들게 된다. 여기에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름을 남겼던 다섯 명의 자객들 – 조말(曹沫), 전제(專諸), 예양(豫讓), 섭정(聶政), 형가(荊軻) – 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비정하고 어두운 암살자의 이미지가 아닌 자신이 믿는 바와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살아가는 의기로운 마음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객들을 그린 영화가 바로 이 영웅이라는 작품이다.

작품은 진(秦)의 왕궁에 진왕 영정의 목숨을 노리던 세 명의 자객 – 장공(長空), 잔검(殘劍), 비설(飛雪)을 쓰러뜨렸다는 지방의 하급관리 무명(無名)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진왕의 자객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백걸음(百步) 안으로는 아무도 접근을 허락치 않고 오직 그 세 자객을 쓰러뜨린 자에게만 열 걸음(十步) 앞에서의 알현을 허락한다는 규칙에 따라 무명은 진왕의 십보 앞에서 알현을 허락받게 된다. 그리고 무명은 자신이 어떻게 하여 세 명의 자객을 쓰러뜨렸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진왕은 무명이 이야기하는 자객의 성격이 자신이 알고있는 그들의 모습과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무명이 무의식중에 발한 살기로 인해 무명 또한 자신이 노리는 자객임을 간파한다. 그리고 자신이 추리한 무명과 세 자객 사이에 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퍼즐조각을 맞추듯 스토리는 점차 형태를 갖추게 되고 영화 전반에 걸쳐 변화하는 독특한 색조에 의한 시각적 효과에 의해 이 분위기는 더욱 고조된다. 그리하여 진실이 밝혀질 무렵 이미 무명은 자신이 상대를 반드시 죽일 수 있는 거리인 열 걸음 앞에 진왕을 두고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반드시 죽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잔검이 자신에게 남겼던 ‘천하(天下)’라는 두 글자로 인해 망설임을 느끼게 된다. 당장 진왕을 죽이는 건 간단한 일이지만 그를 죽인다면 천하는 다시 전란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민중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그럴 바에야 힘 있는 패자의 출현으로 천하가 통일되는 것이 민중에게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무명에게 망설임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에서 가장 논란을 일으킬 여지가 큰 결말이 나오게 된다. 어떻게 보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합리화시키는, 권력에 부합하는 전개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수백년간을 전란에 시달리면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민중의 생활을 생각하면, 그리고 피는 피를 부르게 되며 당장 진왕을 암살해도 제 2 제 3의 진왕이 언젠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는 그동안 반복돼온 역사의 진리를 살펴볼 때 과연 무명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을까에 대한 판단은 보는 이에게 맡기도록 한다. 어찌됐든 그렇게 해서 무명과 잔검, 그리고 비설은 자신의 신념과 대의를 위해 죽어간다. 그리고 자칫 감상적으로 적당히 그들이 살아남아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식의 결말을 냈더라면 작품 내내 그토록 강조해왔던 ‘자객’이라는 이미지 자체에 대한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러한 우는 범하지 않고 많은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를 짓게 된다.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신선하게 봤던 장면은 진시황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해석이다. 보통은 분서갱유를 실시한 폭군 내지 패왕으로서의 이미지만을 중시하며 묘사하거나 간혹 불로불사 이야기의 소재로서 등장하기 마련인 진시황은 이 작품에서는 때로는 날카로운 직감을 지닌 현인으로, 때로는 무림의 고수 못지 않은 무예의 달인으로, 때로는 주인공을 비롯한 자객들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자이자 그들에게밖에 이해받지 못하는 쓸쓸한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논란의 여지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반면에 영화의 분위기를 살리는 핵심이 되고있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저 열 걸음이라는 개념은 장자(壯子)의 설검(說劍)편에 나오는 ‘열 걸음에 한 사람을 죽이며 천리길을 가도 그 흔적이 남지 아니한다(十步殺一人 千里不留行)’라는 검의 지극히 높은 경지를 묘사한 말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진왕이 잔검이 남긴 劒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깨달음을 얻을 때 남긴 검의 지극히 높은 경지는 첫째가 몸과 검이 하나가 되는 단계 – 즉 신검합일(身劍合一)을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마음이 곧 검이 되어 실제 검이 없더라도 초목을 검으로 삼아 상대의 생사여탈을 자유로이 할 수 있고 맨손으로 싸워도 검으로 싸우는 것과 차이가 없는 경지 – 즉 심즉검(心卽劍)의 경지를 이야기하고있으니 이는 무협이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혼이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하겠다. 또한 세 번째로 진정한 검의 높은 경지는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니 이 또한 장자의 설검편에서 나오는 천자의 검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장공 역을 연기한 배우인 견자단은 무협 매니어들 사이에서는 정평이 나있는 실력파 액션배우이며 덕분에 이 작품에서 주인공 무명역의 이연걸과의 대결장면은 화면효과와 연출로 얼버무린 다른 캐릭터들의 대결신과는 달리 유일하게 액션 자체를 제대로 클로즈업하고있기도 하다. 덕분에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액션신이 바로 이 장공과 무명의 대결장면에서 나오기도 했다.

다른 곳에서도 많이 언급되기에 작품의 미장센이나 중국영화 특유의 물량공세식 스펙터클 등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작품에서 스토리와 영상 중 비중을 두고 봐야 할 곳을 꼽는다면 영상쪽에 손을 들어주는 바이지만 결코 가볍게 봐넘길 수 있는 스토리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만 끝을 맺는다.

1. Grard :무협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느끼지 못할 테이스트들. 국비 지원덕에 “선전영화”소리까지 듣긴 하지만,이 구성은 “타다” 생겨난 게 아닌 것… [02/04]
2. Grard :홍콩도 아닌 본토 영화서 이연걸과 견자단이 붙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02/04]
3. Starless :그렇지! 역시 넌 뭘 아는군! [02/04]
4. Cloudia :그렇구나…장공과 무명의 대결이 제일 멋있었다고 (그 후는 좀 김빠졌다고;) 생각된게 내가 잘 못 본건 아니었군….-_- [02/07]
5. Cloudia :아- 나 아이작.-_-;(습관이 되어서 저 이름 넣어버렸네) [02/07]
6. Starless :아 물론 누군지는 알지 [02/08]
7. Starless :어쨌든 개봉일에 못본 게 한이라면 한이군..-_- [02/08]
8. aniki :으으..정말 최고였음.. [02/12]
9. aniki :음..적색으로 나타나는 무명의 진술과, 청색으로 나타나는 장공의 진술, 그리고 녹색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과거가 합쳐져서 [02/12]
10. aniki :백색이라는 진실로 나타난다는 연출도 왠지 멋들어진듯한…(RGB냐..–;) [02/12]
11. aniki :아아..이런 장공이 아니라 진왕이지…내가 미쳤나.. [02/12]
12. cronos :늦었구먼. 이 책을 한번 읽어보기 바람 “위대한 폭군 진시황평전” [02/19]
13. Starless :추천은 고마운데 실례지만 누구신지? ;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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