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2003
 
아마 95년 1월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고3이었고 한참 본고사 준비를 하고 있던 저는 그 와중에도 친구에게 수퍼패미컴을 빌려다 놓고 종종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빌려다 놨던 게임이 로맨싱 사가 2, 드래곤퀘스트 5, 그리고 전설의 오우거배틀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실 먼저 손댄 건 드퀘5와 로사 2였습니다. 로맨싱사가2는 그 지독한 노가다성 시스템에, 그리고 드퀘 5는 이렇다 할 발전 없는 진부한 구조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아무런 기대감 없이 그냥 그렇고 그런 게임이려니 하고 전설의 오우거배틀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저는 경악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전쟁을 모티브로 한 게임의 구성을 완벽히 뒤엎는 시나리오 전개, 미려한 캐릭터일러스트와 필드 그래픽, 기가 막힌 밸런스, 장엄한 음악, 장대한 스케일의 세계관, 게임 전반에 걸쳐 흐르는 심오한 주제의식 등등. 그야말로 명작의 수준을 뛰어넘어 초절명작이라고 칭하기에 절대 부족하지 않은 게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우거배틀의 세계에 푹 빠져버린 저는 아무런 공략 정보도 없이 혼자서 삽질하면서 최고의 엔딩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진 엔딩이라 할 수 있는 World엔딩(타로트카드 각 장에 해당하는 엔딩이 존재합니다.)을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12사도의 증이라는 월드엔딩 필수 아이템을 모두 찾는데 실패해서 좌절하고 맙니다.

그 뒤 SFC를 반납하고 나서 한동안 오우거에서는 손을 떼고 지내다가 약 1년 후 재수를 하던 시절 오우거배틀의 후속편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제목은 Tactics Ogre – Let Us Cling Together. 당연히 저는 크게 기대를 했었고 그리하여 실제 게임을 접해보게 됩니다만 처음 했을 때의 감상은 솔직히 이게 뭔가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턴제 전략시뮬레이션, 그것도 전투 참가인원이 10명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은 전작에 비해 너무나 스케일이 작았고 무대도 겨우 자그마한 섬 하나. 시스템 또한 너무나 달라져있었으며 그저 화이어엠블렘이나 샤이닝포스 류의 게임을 쿼터뷰화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한동안 플레이를 해보고 나서 느낀 점은 전작을 능가했으면 능가했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단지 그 10명밖에 참가하지 않는 소규모 전투에서 이 정도로 깊은 생각을 해가면서 움직여야 하고 캐릭터의 성장 또한 여타 게임에서 볼 수 있는 막무가내로 키우기가 아닌 밸런스를 항상 신경써가면서 키워야 하는, 그 극악할 정도로 잘 짜여진 구성에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전작에 얽매이지 않는 혁신적인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특유의 무거운 주제의식 또한 변함 없이 잘 살아있어서 이토록 깊이 생각해가면서 즐길 수 있었던 게임이 또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느낌을 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만한 턴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은 없었다라고 감히 단언하는 작품이 됐습니다.

그 뒤로 Nintendo 64로 오우거배틀 3가 나왔습니다만 이는 그 전까지의 디렉터였던 마츠노 야스미씨가 빠져나갔기에 그렇게까지 크게 해야겠다는 의욕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언제고 기회가 닿으면 해보려니 하고 생각만 하는 중입니다. 실제 전작들처럼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난리를 치는 모습도 보기 힘들고 그냥 전작의 답습 정도가 아닐까 하는 느낌입니다만 아직 직접 해본 게 아니니 섯불리 단정짓긴 힘든 노릇입니다.

오우거 배틀 사가는 스타워즈와 같이 8장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전설의 오우거배틀 – 검은 여왕의 행진이 Episode 5에 해당되고 택틱스오우거 – Let Us Cling Together는 Episode 7에 해당됩니다. Nintendo 64로 나온 오우거배틀 3 – A Person of Lordly Caliber는 그 사이인 Episode 6에 해당되며 여기에는 로디스 교국이라는 한 강대국이 모두 얽혀 있습니다. 초반의 에피소드는 오우거배틀의 전설, 천공의 3기사, 4영웅에 관한 이야기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미 게임으로 나온 에피소드 5~7 에 이어 마지막부분인 Episode 8은 그동안 나왔던 캐릭터들이 총집합해서 로디스와 마지막 결말을 내는 내용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합니다만. 그 외에 네오지오 포켓 컬러용 제노비아의 황태자, GBA용 택틱스오우거 외전 등이 발매되어있긴 합니다만 아직 해본 건 없습니다.

어쨌든 오우거배틀은 하나의 환타지물로서 그 세계를 플레이어들에게 공감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고 봅니다. 사실 말하자면 기독교, 일본 설화, 북구 신화 등등 여러가지가 잡탕이 된 듯한 묘한 세계관이지만 그 나름대로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고 그런 분위기를 게임상에서 훌륭하게 살리고 있다는 점이 오우거배틀 사가 최고의 매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Starless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4-21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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