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092003
 
  1. 김용 최후의 작품 녹정기

필자가 최초로 김용소설을 접하고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각 작품별로 평균 10여회를 읽었고 이젠 몇번을 읽었는지조차 셀 수 없지만 김용의 소설들은 볼 때마다 크게 새로움과 깨달음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중에서 김용의 최고 걸작을 꼽으라면 필자는 언제나 천룡팔부와 녹정기 두 작품을 쌍절로 꼽으며 그 중에서도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필자는 언제나 녹정기를 꼽는다.

녹정기는 김용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일문을 이룬 작품이다. 녹정기는 김용이 최후로 탈고한 작품이고 기존의 작품들과 매우 틀린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 인해 녹정기가 연재될 당시 독자들로부터 이는 김용이 쓴 작품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고 한다. 대인대의를 품고 절정신공을 휘두르는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과 달리 이 작품의 주인공 위소보는 제대로 된 무공을 구사하지도 못하며 열심히 익히려 들지도 않는다. 무림의 분규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며 줄거리의 흐름은 역사적인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무협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소설에 가까운 면이 많다. 그러면서도 독자는 이 기이한 이야기를 통해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적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품게 된다. 이러한 작품이 지니는 특이한 성격에 대해 중국 남창항공대학 중문학과의 진묵(陳墨)교수는 1984년 자신이 쓴 김용소설감상이라는 책의 녹정기 평론에서 ‘사불상(四不象)’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즉 무협이되 무협이 아니고(非武非俠) 역사소설이면서 기정소설이기도 하다(亦史亦奇)는 말이다.

  2. 역사소설 녹정기

서문에서 설명했듯 이 작품은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도입부는 명사(明史) 편찬과 관계된 수많은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한 문자옥(問字獄)의 배경 설명과 함께 그 화를 입을 뻔한 당대의 선비 고염무와 당시 청을 물리치고 명을 되찾자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치를 내걸던 비밀결사 천지회(天地會)의 총타주 진근남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위소보는 양주십일(楊州十日)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강희 초년간 양주지역의 기녀원 출신이며 우연히 강호의 호걸 모십팔을 구하게 된 위소보는 모십팔과 함께 북경으로 올라가 우연히 황궁으로 들어가 황제의 총애를 얻게 된 뒤 수많은 역사적 사건에 관여하게 된다.

위소보는 후에 성조(聖祖)라는 묘호를 받게 되는 강희황제(康熙)의 명을 받아 당시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하며 권력을 휘두르던 보정대신(輔政大臣) 오배(鰲拜)를 제거하는 일을 통해 황제가 권력의 기틀을 다짐을 시작으로 해서 불안했던 청나라 초기의 정세를 대변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 – 삼번(三番)의 난(亂)(명말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하는데 공을 세웠던 3명의 한인 출신 왕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 대만 병합(명 멸망 이후 정성공(鄭成功)은 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강희는 정성공의 사후 손자 정극상이 다스리던 대만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네르친스크 조약(중국이 타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조약.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확정지었다.), 그 외의 크고 작은 사건들 – 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다.

원래 역사 속의 실존인물과 가상의 인물을 공존시키면서 가상의 인물이 단지 역사속의 주변인물에 그치지 않고 실제 역사의 주요 무대에 등장하도록 하는 기법은 김용소설에서 가장 장기로 내세우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그러한 기법은 그의 여느 작품보다도 빛을 발하고 있으며 이는 김용이 그의 처녀작 서검은구록의 후기에서도 밝힌 것처럼 ‘사가(史家)는 정사(正史)를 선호하지만 소설가는 야사(野史)를 선호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처럼 작품 곳곳에 야사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실제처럼 꾸며내는 기법과 어우러져 독자는 마치 위소보라는 인물이 역사 속의 실존인물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마저 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상당 수준의 배경지식이 필요한 반면 작가는 작품의 부분 부분에 당시의 사회,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자연스럽게 깔아둠을 잊지 않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의 흐름을 잃지 않게 하는 배려를 하고있다. 이와 같은 기법 덕분에 독자는 명말청초의 중국 역사 공부를 하게 됨과 동시에 실제 역사와는 다른 위소보라는 인물이 존재했던 또 하나의 역사를 접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 작품이 역사소설이면서 또한 기정소설이기도 한 것이다.

  3. 주인공 위소보

  주인공 위소보는 실로 독특한 캐릭터이다. 본래 기녀의 사생아 출신으로서 동네의 건달에 불과했던 그는 모십팔을 따라 상경한 이후 가짜 태감(환관)으로부터 시작해서 일등 녹정공, 무원대장군 등의 작위를 받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대신이 된다. 반면 청나라에 저항하는 비밀결사 천지회의 총타주 진근남의 제자가 되고 청목당의 향주가 됨으로써 청의 대신이자 반청조직의 간부라는 이중적인 신분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벌이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고 사이비종교 신룡교에서는 백룡사라는 직책을 맡게 되며 황제의 명을 받고 소림사에 출가하니 소림방장 회총의 사제가 되어 회명이라는 법명을 받게 되고 몽고 왕자와 서장의 라마와 결의형제를 맺는가 하면 러시아로 건너가 표트르대제의 누나인 소피아공주와 정을 통하고 소피아공주가 권력을 찬탈하는데 일등공신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위소보는 절대 인의를 내세우는 협사가 아니다. 그는 타인을 속이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일을 밥먹듯이 하는 비열한 인물이며 여타 무협소설의 주인공처럼 고강한 무공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상대의 눈에 석회가루를 뿌려 암습을 가하거나 후반부에 익히는 신행백변이라는 경신술을 이용해 도망을 치는 것만을 장기로 삼는다. 글재주가 뛰어난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가 아는 글자는 불과 7,8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디에서나 큰 성공을 거두고 어느 조직에서나 2인자의 자리에 올라서는 놀라운 정치력을 보인다. 이는 작품 내에서도 수시로 묘사되는 도박에 대한 묘사에서 그 연관을 찾아볼 수 있으며 위소보는 걸어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아는 큰 도박꾼이다. 비록 도박사로서의 위소보는 참꾼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함이 많은 속임수에 의존하여 하수만을 잡아먹는 야마시꾼에 불과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런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은 속여도 자신의 사부인 진근남과 황제 강희만은 속이지 않았으며 그의 연전 연승을 높이 본 선비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을 때에도 그는 이를 거부했다. 필요할 때는 과감한 결단력을 보이고 위급하다 싶으면 즉시 물러선다. 이러한 나아감과 물러섬을 아는 자세는 그의 머리가 목 위에 붙어있도록 함과 동시에 언제나 큰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됐다.

  위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이 작품에서 위소보와 가장 큰 연관을 지니는 인물을 꼽자면 그의 사부인 진근남과 주군인 강희제이다. 진근남은 한족(漢族)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구시대, 즉 명나라를 대표하며 위소보의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이다. 강희제는 만주족을 상징하는 인물이고 신세대, 즉 청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며 위소보의 죽마고우이다. 위소보의 출신은 불분명하다. 그는 기녀 위춘방의 사생아이며 아버지를 모른다. 따라서 그는 한족일 수도 있고 만주족일 수도 있고 그렇기에 그가 이중의 신분을 지니면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사실 또한 납득할 수 있으며 그런 그에게 아이덴티티를 제공하는 인물이 이 두 명인 것이다. 김용의 여타 작품에서는 이민족을 배척하는 한족 정통론을 내세우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민족까지도 모두 중국인으로 보는 포괄적인 개념의 중화사상을 내세운다. 작품 중에서 진근남이 사망하면서 천지회가 몰락하고 청나라가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은 신구세대의 교체를 나타냄과 동시에 그러한 사상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위소보야말로 모든 이민족을 하나의 중국인으로 묶는 통합된 중화사상을 한몸에 축약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비열한 소인배이지만 임금에게 충성하고 친구를 돕는다. 한인도 아니고 만주인도 아니기에 – 무엇보다 본인에게 그런 자각이 없기에 – 어떤 민족성을 지니지도 않는다. 무공과 지식은 형편없지만 과감한 결단력과 뛰어난 언변과 놀라운 임기응변으로 난국을 타개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이 위소보란 인물을 창조해냈다는 사실이야 말로 이 작품이 그 어떤 소설과도 차별화되는 무도 아니고 협도 아닌 독자적인 일문을 이룬 작품이라는 근거라 할 수 있다.

  4. 천하(天下)를 좇는 군웅들

  작가는 이 작품의 도입부에서 선비들의 대화를 통해 제목의 뜻에 대한 설명을 풀어놓는다. 사슴은 순하고 저항할 줄 모른다. 하지만 무리를 지어서 행동하기 시작하면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는 백성들을 종종 사슴(鹿)에 비유하곤 했다. 하(夏)의 우왕(禹王)은 구주(九州)의 쇠를 거둬들여 아홉 개의 솥을 만들고 거기에 각각 구주의 명칭과 산천을 새겨 아홉 개의 솥을 가지는 자가 천하의 주인이 된다고 했다.

  그러한 제목 그대로 이 작품에는 패권을 노리거나 그에 관련된 군웅들이 나온다. 부모자식간의 정을 그리워하면서도 결국은 국가지대사를 더 중요시하는 강희제, 매국노의 오명을 쓰면서 권력을 쥐었지만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반역을 일으키는 평서왕 오삼계, 명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순식간에 천하를 청나라에게 빼앗긴 틈왕 이자성, 명나라의 마지막 공주 장평공주, 헛된 망상에 사로잡히는 신룡교 교주 홍안통, 형을 시해하고 연평군왕 자리를 찬탈하는 정극상과 이를 돕는 풍석범, 섭정여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소설상에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후일 동생을 시해하려다 실패하고 역으로 유폐당하는 러시아의 소피아공주 등등. 녹정기는 이러한 천하를 노리는 군웅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삼국지와 같은 장수들의 무용과 군사들의 신기묘산이 어우러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못지 않은 인물들의 이해관계와 감정싸움이 얽힌다.

  그리고 여기서 작가는 강희제라는 인물을 하나의 이상적인 군주의 형태로 내세운다. 필자는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실제 그의 치적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까진 알 수 없지만 그도 사람인 이상 틀림없이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는 정치를 펼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강희의 시대에 중국은 문화 경제 외교면에서 역대 그 어느 왕조보다도 융성했고 강희는 역대 중국 황제 중 가장 오랜 제위기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품 중에서 그런 강희의 치세에 따라 천하는 점차 안정돼가고 청나라의 기틀이 공고해짐에 따라 천하를 잡아보겠다는 야망은 하나 둘 사그러진다. 심지어 선비들은 마지막 희망으로 위소보에게 황제가 되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해보지만 그조차도 위소보의 거부로 무산된다. 그리하여 천하는 이민족이 세운 청나라의 시대로 굳어지게 되니 이야 말로 역사의 흥망성쇠가 한 편의 소설 속에서 고스란히 묘사됐다고 볼 수도 있다.

  5. 맺으며

  비록 장황하고 딱딱한 글이 됐지만 녹정기는 곳곳에서 작가의 뛰어난 유머감각을 엿볼 수 있는 재기 넘치는 작품이다. 다른 김용의 소설들을 찾아봐도 이정도로 많은 말장난과 개그를 찾아보긴 힘들다. 이는 주인공 위소보라는 인물의 성격 설정으로 인한 부분도 크지만 덕분에 어떻게 보면 김용의 다른 작품에 비해 딱딱한 분위기로 전개되는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배려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어쨌든 장대한 스케일, 수많은 개성 넘치는 캐릭터, 소설의 긴 분량이 절대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작가의 뛰어난 스토리텔링 등 여러 모로 이 작품은 김용 소설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것이며 그렇기에 필자는 이렇듯 졸문을 남겨가면서까지 이 작품의 일독(一讀)을 권하는 바이다.

  끝으로. 여담이지만 옛날 중원문화에서 나왔던 최초의 녹정기 번역판은 서장 부분의 명사사건에 대한 개요와 오륙기와 고염무, 그리고 진근남이 만나는 장면이 잘렸다. 그리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텍스트파일판 녹정기에서도 이 장면이 잘려있으니 그러한 불완전한 것으로는 이 작품의 진경을 맛보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녹정기를 보고자 하는 분은 반드시 제대로 된 완역판을 구해서 볼 것을 권장한다.

  One Response to “녹정기 평론”

  1. 참고로, 강희제의 정치를 논하자면, 강건지성을 빼놓으면 안될겁니다.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태평성대죠. 무려 130여년을 상회하는 시기입니다. 물론, 건륭제 마지막에 간신 화신을 총애하면서 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강희가 그 강건지세를 시작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강희가 괜히 천고일제라는 별명을 얻은게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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