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032004
 
중국 후한시대의 조엽이라는 인물이 썼다고 하는 오월춘추라는 책은 춘추시대 오나라와 월나라의 상쟁을 기록한 책이다. 거기에는 월나라 병사들의 검술이 오나라의 병사들만 못해 늘 전쟁에서 졌지만 월녀라는 신비의 고수 여검객의 지도를 받아 월나라 병사들의 검술은 천하무적이 됐고 덕분에 오나라를 이길 수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말하자면 월녀란 중국 야사에서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여협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월나라에는 아름다운 한 처녀가 살고있었다. 그녀는 남쪽지방의 인적과 멀리 떨어진 북쪽 대나무 숲속에서 자라났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신묘한 검술을 칭찬하였다. 월나라왕은 사신을 파견해 격금무극술을 가르쳐 달라며 후한 예물을 보내 그녀를 초청하였다. 그녀는 월나라왕을 만나러 가다가 자칭 원공이라는 한 늙은이와 만나게 된다. 원공이 그녀에게,

“듣자하니 네가 검술을 제법 잘한다는데 한 수 배워 보자꾸나.”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당당하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 소녀, 어찌감히 노선배를 속일 수 있으리오 노선배께서 한번 시험해 보시죠.”

이에 원공의 손길이 숲속에 있는 대나무에 뻗치자 마자 흡사 고목이 쓰러지듯 댓가지가 잘려져 나갔다. 그녀는 손을 뻗어 떨어지는 대나무 가지를 받아들었다. 원공은 대충대충 다듬은 댓가지를 꼰아쥐고는 그녀를 향해 찔러 나갔는데,그녀의 반응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가늘고 짧은 대나무 끝으로 반격해나갔는데 정확하게 원공의 죽간 끝을 맞추어 찔렀다.
이렇게 서로 3번씩 공수를 주고 받은 후 그녀는 다시 원공을 향해 깊이 찔러나니 원공은 이를 당해낼길이 없어 훌쩍 높은 나무위로 올라가 갑자기 흰원숭이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길게 울부짓다가 어디론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뒤 그녀는 월나라왕을 만나게 되고 왕은 장교들을 보내 그녀로부터 그 신묘한 검술을 배우게 하여 다시 이것을 보졸들에게 가르치니 월나라 군대의 무술은 그 수준이 열국 중에서 제일 높게 되었다.
(출처 : http://www.netuni.net/netropolitan/network/network.asp?id=249&City=%EB%B2%A0%EC%9D%B4%EC%A7%95 )

그리고 위의 이야기를 각색해 신비한 무협의 세계로 이끌어낸 작품이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월녀검이라는 작품이다. 월녀검은 김용의 15편의 작품 중 가장 짧은 작품임과 동시에 가장 나중에 발표한 최후의 작품이기도 하다.(탈고한 시기로 보면 녹정기가 최후의 작품이 된다.)

이 작품은 오나라와 월나라에 얽힌 세 가지의 소재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하나는 위에서 소개한 월녀의 전설, 또 하나는 오월동주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치열했던 오나라와 월나라간의 상쟁과 그 중에서도 와신상담으로 잘 알려진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제나 중국 사대미인의 제일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절세미인 서시와 월나라의 대부 범려의 로맨스다.

우선 월녀라는 인물이 실존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애초에 오월춘추가 정사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잡기에 가까운 기록이기 때문에 오월의 치열했던 경쟁 속에서 양념처럼 피어난 설일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소설의 소재로 다루는 데 있어 그런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월녀라는 여류 고수의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며 이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무협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거기에 작가는 월녀라는 캐릭터를 설정하면서 약간의 양념을 덧붙인다. 즉 소위 무협소설의 여고수라 하면 차가운 이미지로 남성을 짓밟거나 교태로운 이미지로 남성을 홀리는 형태의 캐릭터가 주류를 이루는데 오월 양국의 명운을 뒤흔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월녀쯤 된다면 대체 어떤 여성이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기 마련이다. 작가는 그 허를 찌르고 산 속에서 양을 치며 지내는 순박한 시골처녀 아청을 등장시킨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녀는 위의 설화의 원공을 각색한 하얀 원숭이와 매일 같이 싸우면서 절세의 검술을 이뤘지만 정작 자신은 그게 검술이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고 따라서 검술을 가르칠 줄도 모르기에 범려는 병사들을 그녀와 대련시켜서 모든 병사가 조금씩 그 초식을 익히게 하고 다시 서로에게 그 초식을 가르치게 해서 단 3일의 지도만으로 월나라 병사들의 검술은 천하무적이 된다. 이렇듯 캐릭터 설정뿐만 아니라 검술을 월나라의 병사에게 전수하는 방식 또한 기이하기 짝이 없어서 위의 설화를 보고 일반적으로 상상하게 되는 월녀에 대한 이미지는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오월동주와 와신상담에 대한 고사는 워낙에 유명하니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고 스토리 전개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점은 이 소설은 월왕 구천의 오왕 부차에 대한 복수 이야기 같은 게 아닌 범려와 서시, 그리고 월녀 아청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범려와 서시가 이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범려는 이후 월왕 구천의 곁을 떠나 치이자피라고 이름을 바꾸고 다른 나라로 건너가서 큰 부를 이뤘고 서시는 거기서 자결했거나 분노한 오나라 백성들에게 죽었다는 설이 있다. 반대로 범려와 서시는 서시가 오나라로 가기 전부터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이후 둘은 재회해서 태호변에서 뱃놀이를 하며 행복하게 지냈다는 설도 있다. 당연하게도 소설에서 써먹기에 매력적인 소재는 후자이고 작가는 여기에 다시 아청이 실은 범려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3각관계라는 양념을 첨가한다.

아청은 재회의 기쁨에 겨운 두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고 살의를 느껴 서시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게 된다. 이 부분만을 놓고 보자면 여느 흔한 로맨스물 같은 전개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의 필력이 진가를 발휘하는 부분은 바로 이 장면에 있다. 연적의 가슴에 칼을 겨누고 찌르려 했지만 서시의 아름다움을 본 아청은 그만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말게 되고 자신은 그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여겨 칼을 거두고 떠나고 만다. 중국의 많은 문학작품에서 서시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지만 정작 그 실물을 볼 길은 없다. 작가는 여기서 서시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한 방법으로 연적조차도 그 아름다움에 감복하고 칼을 거두게 만든 것이다. 대체 얼마나 아름다우면 그럴 수가 있는 것일지 독자는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그리고 아청이 서시에게 칼을 겨눌 때 뻗는 기로 인해 내상을 입은 서시는 이후로 종종 가슴에 통증을 느껴 표정을 찡그리며 가슴을 부여잡게 되고 이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여서 후일 여인의 미태를 표현하는 말인 서자봉심(西子捧心)의 근원이 됐다고 하니 독자들은 그 아름다움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지경이었으리라 여기게 된다.

이렇듯 월녀검이라는 작품은 오나라와 월나라 사이에 있던 몇 가지 실화와 설화를 작가가 적당히 짜집기하고 거기에 스스로 각색을 더해 만든 월녀라는 신비의 여성과 서시와 범려에게 바치는 오마쥬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이 작품은 김용의 작품 중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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