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02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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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한 번 평을 써둬야겠다고 마음만 먹으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홈도 리뉴얼했는데 뭔가 게임에 관해 진지하게 쓴 글 하나정도는 올려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하여 쓰기 시작. 늘 그렇듯 플레이해본지 꽤 지난 상태에서 쓰게 되는 글이고 게임이 발매된 시점에서도 한참 벗어난 상태이긴 하지만 애초에 그런 거 신경써가면서 게임얘기 해본 기억은 없다.

아무튼 이 글에는 내용누설이 상당수 포함돼있고 이 게임은 내용을 미리 알게 될 경우 정말로 게임의 흥미의 90%정도는 날아가버린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아직 게임을 플레이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 글의 게임 소개부분 이상을 읽지 말기를 권장한다.

제작사 : Kid(참고로 필자가 플레이해본 이 회사의 작품은 Ever17 하나뿐이다. 따라서 이 회사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는 불가능하다.)
발매일 : 2002년 8월 29일
기종 : Dream Cast, Playstation 2(이후 윈도우판으로 이식)
게임 홈페이지 : http://www.kid-game.co.jp/kid/game/game_galkid/infinity/ever17/index_1.html

개요
서기 2017년, 수심 51미터의 바다에 건설된 해양 테마파크 LeMU. 이곳은 온갖 하이 테크놀로지가 결집된 꿈의 놀이공원이다. 그러나 2017년 5월 1일 오후 12시 31분, LeMU 내에는 갑자기 예상외의 침수사고가 일어나고 방문객들은 모두 대피했으나 미처 대피하지 못한 7명의 남녀가 고립된다.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점차 붕괴해가는 LeMU, 완전붕괴까지의 시간제한은 약 1주일. 그리고 만연하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과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서부터는 내용누설이 포함돼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 게임을 플레이해보지 않으신 분은 절대로 펼쳐보지 않도록 경고한다. 이 리뷰는 정말로 게임을 플레이해본 사람만을 대상으로 쓰는 것임을 밝혀둔다. 사족이지만 아직 게임을 안 해보았고 일어를 할 줄 아시는 분이라면 꼭 플레이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단언하는 바이다.


Leaf의 To Heart의 상업적 성공 이래 비주얼노벨이라는 장르는 주로 스토리를 중시하는 성향의 PC용 18금게임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예를 들자면 Key의 ‘Kanon’과 ‘Air’, ‘Clannad’라든지 DO의 카나~여동생, Age의 ‘그대가 바라는 영원’과 같은 작품이 있다. 이들은 주로 현실적인 세계에 비현실적인 요소 – 윤회전생, 초능력, 오컬트 등 – 어떻게 보면 신파적인 최루성 요소 – 불치병, 교통사고, 기억상실 등 – 들을 적절히 융합하고 거기에 게임이기에 가능한 선택지에 의한 시나리오 분기를 통해 단순한 트렌디드라마나 환타지 라이트노벨과는 다른 감각의 감동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일반인 플레이어도 즐길 수 있도록 18금 요소를 빼고 플랫폼을 PC에서 콘솔게임기로 옮긴 작품들이 나오게 된다. F.O.G의 ‘영원의 인연(久遠の絆:쿠온노키즈나)’ 같은 게임은 키즈아토에서 영향을 받은 느낌을 많이 주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이고 뛰어난 스토리 구성을 통해 열렬한 지지층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예를 든 작품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비주얼노벨들의 전형을 답습했을 뿐 게임적으로 어떤 참신한 요소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비주얼노벨의 상궤를 탈피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작품이 여기 적고자 하는 Ever17이라는 작품이다.

이 게임의 초반부는 얼핏 보면 일종의 재해(Disaster)물을 비주얼 노벨로 옮긴 것이 아닌가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플레이어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고립된 공간에 갇힌 젊은이들이 그 속에서 생존해나가고 결국 마지막에는 탈출해나간다는 전형적인 구조로 전개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고로 인해 밀폐된 해저 테마파크라는 공간이 나오고 거기에 덧붙여 다수의 히로인이 등장하며 플레이어는 이들을 하나 하나 공략해나가는 일반적인 패턴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게임을 플레이해가면서 플레이어는 어떤 위화감을 받게 된다. 게임 초반에 선택하게 되는 두 명의 주인공 – ‘쿠라나리 타케시’라는 청년과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소년’, 두 명의 시점에서 초반을 전개하게 되는데 어느 쪽으로 가나 일어나는 사건과 등장인물은 거의 유사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다. 밀폐된 해저도시에 갖히게 되는 인물들은 주인공인 타케시와 소년을 비롯해 해저 테마파크 LeMU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다나카 유비세이인 하루카나 – 통칭 하루카, 코마치 츠구미, 아카네가사키 소라, 거기에 타케시의 시점일 때에는 ‘야가미 코코’라는 소녀가 등장하고 소년의 시점일 때에는 ‘마츠나가 사라’라는 소녀가 등장한다.

눈치가 빠른 플레이어라면 이쯤에서 이상함을 느끼게 된다. 같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시점과 타케시의 시점에서 전개가 미묘하게 다르다. 양쪽에서 각각 등장하는 인물이 다르게 나온다. 종종 장황한 설명조가 되는 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게임중에 반복해서 평행세계와 다차원우주에 관한 설명이 나오곤 한다. 그리하여 플레이어는 나름대로 두 명의 시나리오는 일종의 패럴렐 월드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게 된다. 그리고 두 패럴렐월드를 이어주는 접점은 무엇일까 하고 의문을 가지면서 게임을 플레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되고 나면 플레이어 – 당신은 이 게임의 제작자의 의도에 완벽하게 속아넘어간 것이다. 다차원 평행우주를 끊임없이 강조해온 이유는 전혀 다른 부분에 있었으며 두 이야기는 실은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차 – 17년 – 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완벽하게 이어지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냐 하고 의문부호를 던질 수도 있겠지만 이 게임을 직접 플레이해보면 그 당위성에 대해 납득하게 된다. 그 비밀은 이 게임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초월적인 존재 – Blick Winkel(블릭 빙켈 – 제 4시점)의 존재에 달려있다.

여러 차원을 오가면서 모든 사건의 수수께끼를 알고 있고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의 경위를 체험한 존재, 게임상에서 그러한 일이 가능한 사람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정답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 자신이다. 게임이란 원래 플레이어가 게임의 내용의 진행에 간섭하면서 이야기의 전개를 플레이어의 의도대로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얻게 되는 예술장르라고 이전에 쓴 글에서 서술한 바가 있지만 이 게임에선 그걸 넘어서서 아예 게임 속의 등장인물이 게임 밖의 플레이어를 스토리의 전개에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블릭 빙켈 – 플레이어 – 은 마지막에 주인공인 쿠라나리 타케시에게 모든 비밀을 알려주고 그야말로 플레이어가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싶은 결말을 이끌어낸다. 중요한 사실은 정말로 이러한 전개방식은 게임이라는 표현방식이 아니었다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했을 일이며 놀랍게도 여기에서의 설명만 들으면 억지로 들릴지도 모르는 결말부분이 실제 게임을 플레이해보면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게 자연스러운 전개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 부분은 사족이 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중요한 부분이기에 언급해둔다. 각 주인공 – 타케시와 소년에게는 각각 두 명의 히로인이 공략대상으로 준비돼있는데 이들 시나리오를 모두 클리어하고 나면 최종장 ‘야가미 코코’편이 발현된다. 여기서 당연하게도 플레이어는 코코가 공략대상이리라 생각하고 플레이를 시작하게 되는데 위와 같이 각 시나리오간의 모든 연계가 몰아치듯 밝혀지고 플레이어는 게임 속의 ‘블릭 빙켈’이 돼서 주인공을 구원하게 된다. 그리고 코코는 마지막에 블릭 빙켈을 향해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긴다. ‘언제고 태어나게 될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다’ 라고.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게임 속의 히로인 공략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게임 속의 주인공이 히로인을 공략하는 과정이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런 형태에서의 ‘공략’은 다른 게임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정말 특이한 형태라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도 이 최종장은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위에서 적은 이야기 외에도 이 게임에는 많은 숨겨진 요소가 존재한다. 사라와 소년과 츠구미와 타케시의 관계, 어떻게 같은 인물이 다른 시대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의 수수께끼, 해저에서 발견된 치명적인 바이러스 티프 브라우와 그에 상반되는 또 다른 바이러스의 대극적인 관계, 물리학 내지는 유전공학에 관계된 소재들 등등 여러 가지 흥미로운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이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최종장이야말로 이 게임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으며 전반의 네 개의 챕터는 이 최종장을 위한 서장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츠구미의 이야기는 눈물을 자아내게 할 만큼 절절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게임이었기에 가능했던 그 표현양식이야말로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기 힘든 이 게임만의 독자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으며 이만 마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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