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2006
 
아마 10여년 전에 MBC에서 애니메이션판을 방영해준 바 있는 그 작품을 봤다. 당시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작품이라 내용이고 설정이고 전혀 몰랐지만 지금 이렇게 원작을 읽고 나자 든 생각은 당시에 이걸 왜 안 봤을까, 그리고 봤으면 나 역시 수 년간 그 애니메이션의 결말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렸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이 작품은 총 5부 구성으로 돼있는데 애니메이션은 4부 내용까지만 전개되고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4부 결말이란 게 참… 하다. 한참 재미있게 보던 도중 그 부분에 대해 H모님께 내용누설을 당하는 치명타도 맞았지만..(생각해보니 다른 쪽에서 마술사 오펜 한참 보던 당시 누가 누구 아들이네, 누구랑 누구가 동일인물이네 하는 내용누설을 당한 경험도 있다..) 아무튼 그래도 5부에서 상당히 잘 끝난다. 이걸 꼭 해피엔딩이라고 봐야 하는가에 대해선 좀 애매하다. 죽을 사람은 다 죽어나가고 중요한 결말지을 건 깔끔하게 결말을 지어버리기 때문에 글쎄, 주인공 한정으로 보자면 해피엔딩이 맞을 것이다.

이 작품은 전체에 걸쳐 작가의 애환이 담긴 작품이다. 내가 본 판본은 12권짜리 와이드판인데 여기에 보면 매 권마다 권중과 권말에 제작에 얽힌 비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작품이 처음 연재되기 시작한 건 1978년 꽃과 꿈에서였는데 당시 스케반 형사를 끝낸 작가는 다음 작품으로 무엇을 그릴지에 대해 편집회의를 하면서 학생시절부터 생각했던 이야기인 ‘소년이 큰 칼을 휘두르며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리고싶다고 했지만 당시에 환타지, 소년 주인공은 도저히 먹힐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편집부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꼭 그리고싶어서 내건 조건이 ‘1년간 연재 후 반응이 신통찮으면 스케반형사 2부를 그린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1부였지만 역시나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 결국 미완인 채로 1부 결말을 맺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스케반형사 2부를 마무리지은 후 지친 작가는 더이상 그리고싶은 것도 없고 의욕도 떨어져서 차기작에 대해서도 그다지 열의를 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때 편집부에서 들고 나온 카드가 바로 ‘피그마리오 2부를 재연재하자’는 것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이제는 ‘소년 주인공’, ‘환타지’ 등의 소재가 먹히게 된 것이다. 눈이 번쩍 뜨인 작가는 활활 불타오르며 ok하고 연재를 재개했고 그리하여 총 27권에 걸친 이 긴 이야기가 이어지게 됐다.

그러나 연재도 순탄치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특히 5부 돌입 직전의 11권 권중후기에 보면 ‘당시 저는 인생의 최고의 파트너를 잃었습니다’라고 회고하는 부분이 있는데 말 그대로 피그마리오의 클라이맥스에 돌입하기 직전 부인을 사별한 것이다. 이 타격으로 한동안 연재도 쉬고 아무 것도 못했던 모양이지만 결국 모든 걸 잊고 작품에만 전념한 결과 5부의 그러한 전개를 그려낼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확실히 5부의 전개에는 어딘가 귀기 넘치는 번뜩임 비슷한 느낌도 있는데 작가가 그런 극한의 상황에 치달아있었기에 그런 느낌으로 나왔구나 싶기도 하다..

와다 신지는 여성지에 연재를 하는 남성작가로도 유명한데 보통 여성 작가의 만화에서 취약한 부분인 스토리텔링에 있어서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훌륭한 템포를 보여준다. 덕분에 이 작품은 상당한 장기연재작이면서도 그다지 늘어진다거나 하는 느낌을 주지 않고 묵직한 전개 속에 중간 중간에 쉬어가는 에피소드를 적절히 배치함으로써(실은 작가가 그리고싶어서였다는 쪽이 강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로 하여금 높은 몰입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게다가 단순하고 알기 쉬우면서도 호감가는 캐릭터 설정, 작가가 그리고싶은 이야기를 그려냄으로써 보이는 작가의 캐릭터 하나 하나에 대한 애정, 어딘가 그리스 로마 북구 등 각종 신화를 잡탕한듯 하면서도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일궈낸 세계관 등 최근의 만화에서도 귀감으로 삼을 만한 요소로 가득한 수작이다.

  6 Responses to “피그마리오 완독”

  1. 성으로 달려가면서 ‘그동안 시청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뜨던 라스트 장면은 제 애니 인생에 손꼽히는 트라우마 중 하나였습니다OTL 크루트는 제게 있어서 유일한 ‘왕자님’ 이었고요. (순수하게 말 그대로의 의미로 왕자) 주인공에게 있어서라도 해피엔딩이라니 나름 기쁘네요. 😀

    만화책 초반부터도 ‘순정만화에서 이런 짓 해도 돼?;’ 싶은 무지막지한 전개나 연출이 많았지만 그게 단순히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내용 없는 컷이 아닌 것이 좋았어요. 덕분에 심장을 쥐어뜯으며 엄마야 무서워 살려주세요; 하고 항복한 적도 많지만요. (그 장면 자체의 공포보다는 그 장면이 어떤 의미인지가 정말 무서운 게 많았던;)

    완독하셨다니 부럽습니다. 축하드려요-

  2. 우워어- 피그마리오가 애장판이라도 나온 건가요! 절대로 다시 보고 싶어요 ;ㅁ; (비장의 옷장 속 500원 단행본 중 하나였…)

    사실 애니쪽은 기억하는 단행본보다 못해서 별로 안 좋아했는데, 봐뒀더라면 참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기억나는 건 역시 두 사람의 오리에라든가 얼굴 벗겨진 공주님이라든가(…)

  3. 내가 피그마리오를 처음 접했던게 대략 85,6년즈음이었음.

    어케 대강 구해서 본게 1부 마지막정도였던듯…………….

    오랜세월 그 끝을 궁금해 하면서도 잊고 있었는데,

    김미(……..)

  4. 그 어린 시절, 매주 “피그마리오~~~~!!!”를 오프닝 가수와 함께 외치며 눈에 불을 켜고 시청하던 당근은 “지금까지 시청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자막을 보고 처음으로 방송사의 횡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여태 까지 트라우마로 안고 있었는데, 그거 방송사의 횡포가 아니라, 원래 애니메이션이 거기까지 밖에 없는 거였던 겁니까?!!!OTL

    네타가 필요합니다, 네타가!! 그 애는 누구 아들이고 입양아들은 결국 어떻게 되는 겁니까!!

  5. Hylls // 후후 빨리 보세요. 전 한 번에 끝까지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동굴곰 // 소녀만화지에 연재된 작품 치고는 미묘하게 고어한 묘사가 많아서 놀랍더군. 잘도 그런 걸 허용했구나 편집부.

    선배 // 후후 선배는 이미 받았으니 빨리 보셈.

    당근 // 위에 달린 답글들에서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메신저 등지에서 컨택 걸어주시면 암흑의 루트에서 구한 물건 쏴드리겠습니다(..)

  6. MBC 마지막편을 보고 분명 방송국에서 자른 거라고 엄청 분노했다가 91년도 뉴타잎을 구해보고, 그게 진짜 애니 마지막화라는 걸 알았어요. 96년부터 일본 갈 때마다 북오프등지(절판된지 오래라 일반서점에선 구하기 힘들어서)에서 이빠진 권수를 모아 지금은 27권 빼고는 다 모았습니다.  문고본을 살까하다 지금까지 모은 게 아까워서 어떻게든 마지막권을 get하려고 참고 있는 중.  전 아스나스X정령 오리에 or 쿠르트X정령 오리에 커플을 지지했어요. 어느쪽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슬퍼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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