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2006
 
지난 주말에 있던 일이다. 집에 간만에 지인들을 불러다 놀고 있는데 삼국지 11을 잠깐 시연하게 됐다. 거기서 보너스 고대무장으로 등장하는 유방과 항우 등에 대해 얘기하다가 누군가가 유방은 유비 같은 놈이라 싫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유비 싫어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유방은 유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물이며 무엇보다 유비는 결국 천하통일에는 실패했지만 유방은 해냈다는 아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게다가 유비를 싫어하는 핀트가 어딘가 어긋나있다는 느낌이 들어 잠깐 확인해보니 초한지를 읽어본 건 아니며 읽어본 삼국지는 이문열 삼국지 하나뿐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삼국지를 볼 때에는 주인공은 언제나 유비 관우 장비 3형제였다. 거기에 제갈량의 신기묘산과 조운 마초 황충 오호대장군의 위용 등 언제나 중심에는 촉이 있었고 조조는 말 그대로 난세의 간웅이었으며 손권은 적벽대전을 제외하면 항상 어딘가 변두리적인 존재였다. 유비가 각지를 전전할 때에는 그렇게 답답하다가 제갈량을 얻고 입촉하여 정족지세를 이룰 때의 카타르시스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유관장 삼형제가 죽고 제갈량마저 떠나갈 때는 정말로 책을 덮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뒷얘기가 궁금해 흥미가 크게 떨어진 상태에서도 강유와 등애, 그리고 사마씨 집안 인간들의 이야기까지 다 읽으면서 세상은 한나라 천하로 끝난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렇게 천하를 잠시 얻은듯 했던 사마씨 집안의 진나라조차 후일 다시 오호십육국으로 사분오열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결국 영원한 승자란 없다는 나름대로의 교훈마저 얻은 바 있다.

그러던 게 언젠가부터 조조의 재해석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연의에서 비열하고 간사한 인물로 묘사된 조조가 사실 정사에서는 상당히 빼어난 인물이었으며 실질적으로 삼국에서 제일 강성했던 위나라를 세운 인물로서 여러 모로 그의 업적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 조조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 창천항로가 나왔고 이문열씨는 자신이 평역해서 써낸 삼국지에서 조조를 심히 거슬릴 정도로 추켜세우면서 조조에 대한 열변을 토한 바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런 조조를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되려 유비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경향이 일부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문열 삼국지에서 그런 게 심한데 물론 정사에서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일단 삼국지 ‘연의’라는 한 편의 소설의 캐릭터로서의 유비는 철저하게 이상적이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상을 굽히지 않는 그야말로 고전소설의 ‘주인공’적인 인물이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난세에 나름대로 적수공권으로 일어나서 세력은 가장 미약했다 하더라도 조조 등과 대립하고 그 많은 영웅호걸들 틈을 비집고 살아남아 삼국의 한 축을 이뤄낸 인물에 대한 평가로서는 유비라는 인물에 대해 너무 쉽게 여기는 게 아닐까.

유비가 워낙에 평이 갈릴만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최근 주변의 나보다 어린 지인들과 얘기해보면 저런 유비에 대한 폄하가 심한 편인데 정작 유비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경우가 많았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여기에는 이문열삼국지의 폐해가 크다고 보는데 이문열삼국지는 다른 삼국지를 적어도 3회 이상 읽어본 뒤에 봐야 할 삼국지의 방계일 뿐이지 이게 무슨 삼국지의 정석은 아니다. 다만 이문열의 작가로서의 지명도가 워낙 크게 작용하다 보니 어느덧 이문열 삼국지가 학생들의 필독도서처럼 권장되는 판국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본다.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제발 이문열삼국지는 그만 좀 들어가줬으면 한다.

덧. 개인적으로 유비는 좋아하지만 역시 객관적으로 볼 때 유방 >>>>>> 유비이긴 하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웠고 중국인들은 아직도 스스로를 漢族이라고 칭한다는 점에서 이미 유방의 업적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덧 2. 위의 발언자에게는 당장 책꽂이에서 초한지 뽑아다가 읽어보라고 들려 보냈다. 어리다보니 몰라서 그럴 수도 있는 법인지라 답글 등으로 그에 대한 태클은 자제해주시길.

  3 Responses to “삼국지 잡상”

  1. …..후후후. (….)

    근데 삼국지도 여러각도로 볼수 있어서 참 재밋단 말이지.

  2. 어떻게 보더라도 전 유/관/장을 곱게 보긴 어려운데요.

    1. 유비가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 어쩌고 저쩌고 고시랑고시랑…

    ->저건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날조한거랑 그다지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난세에 한탕 해먹으려고 사기를 친 케이스로밖엔 보기 어렵다는거. (속은놈은… 멍청한거겠죠? -_-;)

    2. 일찌기 이종오가 후흑론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유비는 “인덕의 군주”의 탈을 쓴, 냉혈한으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오히려 이 점에 있어서 조조는 어수룩하기 까지 하다고 봅니다. 조조는 “난 조낸 얍삽하고 머리 좋고 실력/수완도 좋고 거기에 야심까지 있는데, 그걸 세계에 선전하고 다닐꺼야” 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다닌 격이거든요.

    3. 보면 유비는 질질 짜는거만 할 줄 알고 그 이외엔 할 줄 아는게 없더라 이런 식으로 유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상당한 모양이긴 한데 (후… 그 많은 책들은 안읽고 이문열 삼국지만 보이나…) 제가 아는 바로는, 연의에서 제갈량의 획책으로 돌아갔던 많은 계책들이 실은 제갈량의 계략이 아니라 유비의 계책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비는 전쟁터에서 구르며 커온 사람이라, 그쪽 잔뼈가 상당히 굵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 장비도 힘만 세고 멍청한 장수라는 이미지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Koei사의 작품이죠. 좀 멀게는 고우영 선생님의 삼국지에서도 이런 이미지가 상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비는 실제로는 상당한 수준의 꽃미남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지략이 출중했다고 하더군요. 다만, 성격이 다혈질인데다 매우 성급한 단점이 있어서 어릴때부터 부모님께서 서예를 시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름대로 상당한 명필이었다고 합니다. (애석하게도 남은 작품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곤 합니다만…) 장비의 지략은 삼국지 군데군데에 보이는데, *엄안을 사로잡는 부분이라던가…* 이런게 장비의 본모습이 아닌, 돌머리가 머리굴리는 장면으로 떠오르는게 좀 찜찜하긴 합니다.

    5. 다 아실 법 한 이야기이니 더 붙이는 것은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이만 줄입니다.

  3. 1. 뭐 사기일 가능성은 높지만 또 아니란 보장도 없죠. 중산정왕 유승은 상당히 호색한이어서 100명이 넘는 자손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고 그 후손들이 탁현 부근에 흩어져 살았다고 하니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얘기죠.

    2~4 뭐 전에도 얘기했지만 전 연의의 캐릭터와 정사의 캐릭터는 분리해서 생각하는 주의입니다. 소설의 유비는 소설의 가상인물 유비고 역사의 유비는 역사의 유비죠. 소설의 유비는 워낙에 평이 엇갈릴만한 인물이라는 점도 분명합니다만 어쨌든 중요한 건 어느 쪽이건 간에 유비가 그렇게 만만하게 볼 인물은 아님에도 최근 들어 지나치게 평가절하당하는 경향이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뿐입니다.

    5. 뭐 그래도 좋은 부연설명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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