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2006
 
근 수 개월에 걸쳐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폴라리스 랩소디를 연달아 독파해서 어쨌든 나온 작품은 다 본 기념으로 한 마디.

일단 그의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라면 역시 놀라운 글빨이다. 그의 작품에는 뭐가 어찌됐든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열중하게 만들고 결국은 결말까지 보게 만드는 뛰어난 흡인력이 있다. 어떻게 보면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딱딱한 이야기들로 가득찬 그의 작품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데에는 그 필력이 가장 크게 공헌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데뷔작인 드래곤 라자 이후의 그의 작품은 딱 거기까지라는 느낌이다. 장대한 세계 설정, 수많은 캐릭터들, 그리고 복잡미묘하게 얽히는 사건들. 특히 눈새와 피새에 들어와 그는 하나의 거대한 에픽에 도전했고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다지 정이 가지 않는다. 특히 캐릭터들이 와닿지 않았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이유는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이영도의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철저하게 사건의 전개를 위한 부속품으로 기능할 뿐 그 이상은 없다. 즉 작가가 원하는 사건의 전개를 만들기 위해 부여받은 성격과 사고방식과 능력이 있을 뿐 작가가 애정을 가지고 인물을 작품 속에서 살아 숨쉬게 하면서 맞닥뜨리는 사건에 대해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하게 만들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의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철저하게 비인간적이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뛰어난 사상가, 정치가, 변설가, 군략가, 심지어는 예언가이기까지 한 완벽한 인간 군상이지만 덕분에 등장인물들에게 그다지 인간적인 약점이나 매력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작가가 자신이 창조해낸 캐릭터에 애정을 쏟다 못해 속박당한 나머지 그 캐릭터에 얽매여 사건 전개의 흐름마저 흐트러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의 강력한 장점이지만 그로 인해 어딘가 캐릭터가 몰개성화돼버렸다는 점은 실로 아까운 노릇이다. 오히려 데뷔작인 드래곤 라자에서는 캐릭터들이 그러한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편이었기에 아직도 가장 기억에 남는 편이다.

결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그의 데뷔작인 드래곤 라자의 깔끔하고 잘 맺어진 결말에 비해 차기작인 퓨처워커의 끝없는 관념적인 대화의 나열 끝에 이루어진 애매한 결말에는 개인적으로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차기작에서는 그런 점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그의 작품의 전통으로 굳어져버린 감이 있다. 항상 설명 불충분에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그의 작품들의 결말을 보면 드래곤 라자만큼 깔끔한 결말을 바라면서 본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특히 동양적 세계관을 지닌 초거대 에픽에 도전한 새 시리즈에서의 결말들은 용두사미라는 느낌마저 받게 된다.

어찌 됐든 그가 현존하는 한국 제일의 환타지 소설가라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앞서 말한 뛰어난 필력과 스토리텔링능력, 그리고 그러한 세계를 설정해내는 상상력은 비견할만한 작가가 손가락으로 꼽을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지나치게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며 그저 부속으로만 작용할 뿐이기에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등장인물들, 애매모호한 결말 등은 그의 소설이 지닌 큰 약점이며 당분간은 그 점에 있어 발전(이랄까 이전으로의 회귀)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덧. 책빌려준 Lunarian양에게 감사

  4 Responses to “이영도 소설들”

  1. 저도 피를 마시는 새, 슬슬 다 읽어가는데, (엄청난 뒷북) …

    역시 저도 드래곤 라자가 제일 좋았습니다.

    오버 더 호라이즌도 괜찮았어요.

    퓨쳐워커는 그래도 마음에 들었지만,

    폴라리스랩소디는 좀 이해가 안 갔고,

    눈물을 마시는 새도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어딘가 인상에는 좀 역부족… 스케일은 크긴 큰데 어쩐지;; 피를 마시는 새는 다 봐가는데. 어쩔라나요. 일만 육천년이라… ;

    뭐 그래도, 유일하게 읽는 한국 판타지 소설입니다.

    신간이 나오면 기대하게 되는 작가임엔 분명…

  2. Sakuragi // 음 단편집정도는 나름 유쾌했지. 작가 특유의 개그들이 작품들 중에서 보이긴 하는데 문제는 그게 작중인물이 하는 개그가 아니라 작가가 하는 개그란 느낌인 것도 있고. 그래도 대충 신간 나오면 챙겨보긴 할듯.

  3. 하지만 서술이라는 점에서는 발전하고 있지 않나요? 드래곤라자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구루구루처럼 rpg에 글만 몇 줄 덧붙인 느낌이었다면 후기작으로 갈수록 점점 소설다워진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하지만 역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뿐이라는 느낌이 들면서, 마치 타나토노트를 보는 것 같달까요,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라는 느낌이 들어서 저도 눈마새, 피마새는 기대보다 별로였어요.

  4. 어 나도 강조했듯 서술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높이 평가함. 그 능력에 덧붙여 극중의 캐릭터가 작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생각에 따른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무리없는 사건전개를 이끌어냈다면 그는 그야말로 신필이라는 칭호를 들어도 무리가 없는 작가였을 거라고 봐. 하지만 그런 작가가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다면 김용대종사님도 신필소리 듣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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