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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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스포일러 있으니 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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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를 봤을 때 그 압도적인 영상미와 잔혹한 현실 묘사에 감동한 나머지 앞으로 저 감독이 맡는 작품은 무조건 봐주겠다고 마음먹은 바 있었다. 어쨌든 판의 미로 덕에 이 감독의 주력장르는 환타지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몇 년이 지나 그가 맡게 된 작품은 놀랍게도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로 만들어낸 거대로봇 대 괴수물이었다. 조금 의외긴 해도 어쨌든 감독으로 보나 장르로 보나 봐야만 하는 영화였다.

영화는 카이쥬(怪獣 : 감독이 일본 괴수물에 바치는 오마쥬임이 보인다)라 불리는 거대 생명체가 해저에 뚫린 차원의 틈을 통해 인류의 영역을 침범해오는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거대로봇 예거(Jäger)를 만들어서 카이쥬들에 대항해서 싸운다. 그래서 이 영화의 구도는 매우 심플하다. 관객은 스토리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큰 스크린에서 거대로봇과 괴수가 박진감 있게 싸우는 모습을 즐기면 된다.

하지만 이 심플한 구도를 묘사함에 있어서의 세부적인 부분을 만들어내는 감독의 내공이 비범하다. 일단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일본의 수퍼로봇 애니메이션과 특촬물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거대괴수와 수퍼로봇이라는 소재 자체가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특촬물에서 수없이 쓰여온 소재임은 말할 것도 없다. 연출에서도 영화 내내 화면에 카이쥬와 예거를 보여줄 때 한 화면에 전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신체의 일부분을 화면에 꽉 차게 로우앵글에서 클로즈업하는 구도를 주로 사용해서 로봇과 괴수의 거대함과 중량감을 묘사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여기서 친숙함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자이언트로보에서 자주 사용된 구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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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거나 그에 대한 오마쥬를 한 부분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파일럿과 기체가 정신적으로 동조해서 기체를 조종한다는 설정은 신세기 에반겔리온, 파일롯의 움직임을 트레이싱해서 기체가 움직이는 설정은 기동무투전 G건담, 다른 기체는 카이쥬가 날린 EMP 충격파에 기능이 정지했는데 구형 원자로를 탑재했기 때문에 혼자 작동이 가능했던 장면은 너무나 명백하게 자이언트 로보, 팔꿈치 부분에서 강력한 부스팅을 일으켜서 펀치를 날리는 장면은 빅 오, 마지막에 틈새에서 원자로를 폭발시키고 탈출하는 장면은 건버스터의 마지막을 연상하게 한다. 중요한 건 이러한 오마쥬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노릇이지만 그런 요소들을 과거의 2D화면이 아닌 3D 스크린에 어울리게 절묘하게 구현해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거대한 배를 몽둥이 삼아 들고 싸우는 장면은 거대로봇물의 로망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장면.

액션 연출도 뛰어나다. 로봇들의 중량감 넘치는 액션은 말할 것도 없고 도중에 집시 데인저의 서브파일럿을 뽑기 위해 대련을 벌일 때의 연출도 상당한 수준이다. 특히 대련이 단순히 잘 싸우는 파트너를 뽑기 위함이 아니라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를 뽑기 위한 것임을 잘 연출해낸 점이 인상적이다. 또한 박진감 넘치게 싸우는 장면 사이사이에 센스 넘치는 연출들을 가미해서 완급을 조절하는 연출력도 볼거리다. 대표적인 장면이 건물 안의 뉴턴의 진자. 아무튼 여러 모로 비주얼에 관한 한 당분간 이 영화만큼이나 관객의 눈을 호강시켜줄 작품이 나오기는 쉽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작품의 지향점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비주얼의 퀄리티를 논하자면 아바타나 프로메테우스와도 견줄 수 있는 작품.

스토리에 대해서는 별 거 없다거나 크게 신경 안 써도 된다는 반응이 많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관객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감독이 소홀하게 다뤘다는 뜻은 아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주인공이 왜 카이쥬와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부여가 알기 쉽게 이루어져있다. 그러면서도 어차피 다들 뻔히 알만한 히어로의 고뇌나 방황과 과거지사 같은 건 과감하게 생략해버리면서도 내용은 적절하게 전달이 되는 덕에 영화 전체적으로 전개가 시원스럽다. 이런 점은 감독의 편집 내공을 높이 평가하게 만드는 부분. 덕분에 러닝타임 내내 한 장면도 지루할 틈이 없다. 마지막에 롤리와 마코가 키스를 안 한 것도 나름 개념. 또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면서도 조연들의 활약을 매력 있게 묘사해낸 점도 훌륭하다. 개인적으로는 러시아 체르노 알파에 탑승했던 언니 멋졌는데 아쉽게도 중반에 리타이어. 그리고 아시다 마나 귀엽다! (..)

감상을 요약하자면 기예르모 감독이 비주얼에서 매우 훌륭한 감독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덕력 또한 상상 이상으로 높아서 깜짝 놀란 영화. 일본의 수퍼로봇물과 거대괴수물이 역으로 서양에 영향을 끼치고 거기에 헐리우드의 자본력이 결합되면 어떤 물건이 나오는지 좋은 의미에서 잘 보여준 작품이다. 그리고 최근의 일본 서브컬처에서 되려 이정도 스케일을 가진 작품이 나오기 힘든 분위기가 돼버린 건 아쉬운 노릇이다.

그 외 신경쓰이는 떡밥들. 나올지 안 나올진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후속편이 나온다면 관계가 있지 않을까.
1. 누가 봐도 명백하게 효율에 차이가 나는데 예거 프로그램 폐기하고 장벽 건설하라고 한 미친 뻘짓을 시킨 놈은 대체 누구. 중국에 장성 쌓았다고 국경 지키는 병력이 필요가 없어졌던가.
2. 저렇게 되면 분명 지구에 카이쥬들의 유전자가 남게 되는 건데, 인류도 저정도 기술력을 지닌 상태면 클론쯤은 얼마든지 생산 가능할 테고…
3. 지구에 차원의 틈새를 열고 카이쥬를 보낸 이들의 정체가 완벽히 밝혀지지 않음. 그정도 기술력을 지닌 존재들이면 틈새도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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